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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포트

아프가니스탄의 내전의 원인

아프가니스탄 내전의 서막

 

. 개요

   

 

아프가니스탄 내전은 1978427일 친소련파 세력이 쿠데타로 사회주의 정권을 출범시키면서 발단되었다. 1973년 쿠데타를 통해 국왕통치체제를 종식시키고 공화제를 채택하면서 대통령에 오른 다우드는 친위대를 동원하여 완강하게 저항하였으나 결국은 중화기로 무장한 친소련 쿠데타 세력에 의해 패배하였다. 다우드 대통령과 그의 가족 및 측근 세력은 반란군에 의해 피살되었고, 쿠데타 과정에서 2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마침내 51일 공산당 세력인 인민민주당의 다라키가 혁명평의회를 설치하고 새로운 정부를 출범시켰다. 그러나, 다라키 정권은 출발부터 불안하였다. 먼저 다우드 정권의 와해에 동조하였던 이슬람교도 동맹과 대립하였고, 인민민주당과 파참파 정당 사이에도 충돌이 일어났다. 또한, 다라키가 군내 내부의 반마르크스주의 장교들을 축출하는 과정에서 상당수의 군인들이 그에 반발하였고, 인민민주당이 토지개혁과 지방자치제 폐지 등의 조치를 취하는 과정에서 지방 부족들의 맹렬한 반발을 초래하였다. 다라키의 인민민주당은 지방자치 대 중앙집권화, 사회주의 대 이슬람주의, 무리한 근대화 정책 대 고유의 전통문화 등의 측면에서 아프가니스탄의 국민과 대립하였다.

결국 다라키 정권이 출발한 이후 수개월도 안되어 정부군과 여러 종족간에 무력 충돌이 발생하였다. 6월부터 8월에 걸쳐 다라키 정권에 대항하는 지방의 반란이 계속되었다. 당시 아프가니스탄은 28개 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 중 23개 주에서 항쟁이 벌어졌다. 다라키 정권은 공군까지 동원하여 지방의 반란을 진압하였으나, 이슬람교도들이 게릴라전을 전개하였기 때문에 진압작전은 성공을 거두기 어려웠다. 특히, 이른바 '무자히딘'(이슬람전사)으로 불리는 게릴라들이 각지에서 다라키 정부군에 타격을 가하였다.

 

 

무자히딘

 

 

  아프가니스탄의 정국이 혼란에 빠지게 되자 소련은 다라키 정권을 지원하기 위하여 군사고문(정부군 지원)과 민간인 전문가(교육과 경제재건 지원)를 파견하였다. 이후 이슬람 게릴라들은 다라키 정권뿐만 아니라 아프가니스탄에 체류·주둔하고 있는 소련인들까지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19793월에는 서부의 도시 헤라트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4월에는 북부 도시 마자리 샤리프에서 소련인 수명이 살해되었다. 8월에는 간다하루에서는 소련 군사고문단과 이슬람 게릴라들이 충돌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라키 정권의 제2인자인 아민 수상이 915일 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직을 차지하였다. 1014일 아민을 축출하려는 역 쿠데타가 발생하였으나 무산되었다. 아민 정권은 다라키 정권보다도 소련에 더욱 의지하여 반정부 활동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내전은 더욱 거세게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갔다. 그러한 내전의 지속으로 1979년 말까지 사상자 수가 5만명을 상회하였고, 10만명 이상의 난민이 파키스탄으로 유입하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편, 다라키와 아민 정권을 지원해오고 있던 소련이 19791215일 아프가니스탄을 전면적으로 침공함으로서 상황은 완전히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소련은 아프가니스탄 정부군이 이슬람 게릴라들의 공세를 진압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수도 카불의 확보, 아민 대통령의 제거, 완전한 소련파에 의한 새로운 정권의 수립 등을 목표로 대규모 병력을 투입시켰다. 이로써 약 9년간에 걸쳐 지속된 '아프가니스탄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목적의 하나는 자신의 타지크 공화국이 이슬람화되지 않도록 봉쇄하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이슬람 혁명이데올로기가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 및 중동지역 전체에 파죽지세로 확산되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의 타지크공화국에 다수의 이슬람교도가 거주하였기 때문에, 소련으로서는 이슬람 혁명이데올로기를 어떻게든 막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렇게 하지 못할 경우 타지크 공화국은 이슬람 세력에 의해 장악될 가능성이 컸다. 더욱이 이웃하고 있는 인도와 파키스탄도 같은 이슬람권이라는 이유에서 정서적으로 아프가니스탄 국민을 지지하고 있었다. 구소련은 아프가니스탄에 수립된 사회주의 정권이 자신의 기대대로 이슬람 세력의 확대를 막아주지 못하자 전면적 침공을 감행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됨으로써 아프가니스탄 내전은 소련군과 정부군이 한편이 되고 이슬람 게릴라 세력과 반정부 세력이 다른 한편이 되는 '2의 베트남전'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아프가니스탄 정부군과 소련군은 사회주의 정권의 존속과 이슬람 세력의 제압을 위해 전쟁을 벌였고, 이슬람 게릴라세력과 반정부군 세력은 아프가니스탄의 완전한 이슬람화와 사회주의 세력의 타도를 목표로 항쟁하였다. 이러한 상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 정부군 520만 명, 구소련군 1013만 명, 이슬람 게릴라 및 반정부군 1015만 명이 9년 동안 전선이 별도로 존재하지 않고 결정적 승리도 없는 '전장 없는 소모전'을 지속하였다.

아프가니스탄에서의 기나긴 소모전은 1980년대 후반에 접어들어 종결 국면을 맞게 되었다. 소련의 국력 약화 및 개혁·개방 추진, 반정부 게릴라 세력의 공세 강화, 아프가니스탄 주둔 소련군의 전쟁의지 약화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종전 분위기가 성숙되었다. 당시 유엔사무총장 데구에야르가 그러한 분위기를 활용하여 평화협상을 추진하였다. 마침내 19884월부터 유엔의 중재 하에 소련,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미국이 참여한 가운데 협상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고, 그 결과 515일 휴전협정이 성립되었다. 휴전협정의 주요 내용은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모든 외국의 간섭을 중지하고,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간의 상호 무력 행사 및 파괴활동을 중지하며, 아프가니스탄 주둔 소련군을 9개월 내에 완전 철수시킨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소련은 1988년부터 단계적으로 군대를 철수하기 시작하였으며, 19893월까지 일부 조사요원만 남겨놓고 철수를 완료하였다.

그러면서도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에서 나지불라 대통령의 사회주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정부군을 강화하기 시작하였다. 소련은 항공기, 지대지 미사일, 전차 등 72억불 상당의 무기와 장비를 나지불라 정부군에게 제공하였다. 그 결과 나지불라 정부군의 군사능력을 현저하게 강화시켜 반정부 게릴라 세력에 대한 공세를 재개하는 계기가 조성되었다. 이로써 아프가니스탄 내전은 소련이 개입하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게 되었다. 나지불라 정부군과 반정부 게릴라 세력을 당사자로 한 내전이 다시 전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나지불라 정부군은 구소련의 군사지원 하에서 반정부 게릴라 세력에 비해 우세한 위치를 점할 수 있었다. 게릴라 세력도 이러한 형국을 인식하고 유화적 전략을 통해 카불을 해방시킨다는 입장을 택하였다. 그러나 나지불라의 사회주의 정권은 소련군이 완전히 철수한 이후 쇠잔해져 갔다.

나지불라 정권의 세력이 약화되어 감에 따라 상대적으로 반정부 게릴라 세력의 공세가 강화되었다. 수도 카불에서 게릴라 세력의 군대가 점차 증강되었음에 반해, 정부군의 병사들은 전쟁기간의 군복을 그대로 입고 각기 자신의 종족에 귀속되어 갔다. 당시 정부군과 게릴라 세력간의 전투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더욱이 소련군이 운반하지 못하고 방치해 놓은 무기와 장비 및 탄약이 게릴라의 여러 파벌 수중으로 들어갔다. 1989년 봄을 기하여 수도 카불을 비롯한 대도시에서 정부군의 모습이 사라지고 게릴라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로써 소련이 지원한 아프가니스탄의 사회주의 정권은 탄생 10년만에 완전히 붕괴되었다.

나지불라 정권의 붕괴와 함께 반정부 게릴라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였으나, 아프가니스탄의 정국은 또 다른 혼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게릴라 세력 내부에서 권력 투쟁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게릴라 세력은 반정부·반소련 항쟁에서는 결속하였으나 공동의 적이 소멸된 이후, 정권의 주도권을 놓고 파벌 싸움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게릴라 세력은 크게 보면 8개 파, 세분하면 수십 개의 조직으로 구성되었으며, 종전의 전쟁기간에도 각자의 세력 확대 과정에서 간헐적으로 충돌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85년부터 1988년 기간동안 수도 카불 근교에서 게릴라들끼리 충돌하여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된 적이 있다. 바로 이러한 게릴라 세력 내부의 잠재적 갈등이 전쟁 종식 이후 1989년 여름 이제까지와는 다른 양상의 내전으로 분출되었다. 이로써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은 평화와 화해를 모색하기보다 자신들이 속한 종족(종족: 파슈툰족 50%, 타지크족 25%, 우즈베크족 10%, 하자라족 10%, 기타 5%; 종교: 수니파 이슬람 74%, 시아파 이슬람 25% )의 세력 확대를 추구하면서 처참한 싸움을 벌이게 되었으며, 오늘날에도 그러한 내전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소련군의 철수로 급격히 약화된 나지불라 공산정권은 결국 19924월 붕괴되었다. 그러나 반소 공동전선을 형성했던 이슬람 반군세력간에 권력투쟁이 전개되면서 또 다른 내전으로 이어졌다. 내전 과정에서 최대 종족인 파슈툰족을 대표하는 탈레반 세력이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이슬람 율법을 배우는 '학생'이라는 의미를 지닌 탈레반은 원래 사우디아라비아의 이슬람 원리주의자에 의해 파키스탄 난민촌에 설립된 종교학교 출신들이 주류를 이룬 세력이다.

 

 

 

 

 

탈레반 정권은 출범 이후 국명을 아프간 이슬람 토후국으로 개칭하고 철저한 이슬람 원리주의에 입각한 정책을 시행하였다. 특히 여성의 직장활동과 교육이 금지되었고, 범법자에 대한 가혹한 극형(손발 절단이나 투석형)도 부활되었다. 탈레반 정권의 극단적인 정책성향은 국제적 비난의 대상이 되어왔는데 20013월 우상 숭배라는 이유로 2천년 된 국제 문화유적 바미안 석불을 파괴하는 등 이교도에 대한 배타적인 정책이 강화되었다.

탈레반 정부군은 파키스탄의 지원을 받아 북부동맹과의 내전을 유리하게 전개해왔고, 북부동맹 측은 우즈벡과 타지크 접경의 산악거점을 중심으로 산발적인 저항을 벌여왔다. 북부동맹은 러시아와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인도, 이란 등의 지원으로 유지되는 여러 종족별 군사조직간의 연합체를 말한다. 오랜 전쟁 참화로 남은 것은 기아에 허덕이는 아프간 주민이며, 수백만의 국내외 난민이다. 그리고 아직도 수백만발의 불발탄과 지뢰는 매일 희생자를 낳고 있다. 탈레반 정권의 무능력은 내전에 더하여 추위와 가뭄에도 속수무책인 상황이다. 유엔과 서방권의 인도주의적 구호활동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이다.

 

 

  한 때 반소 투쟁에서 미국의 지원을 받던 관계인 탈레반 정권이 반미주의 세력으로 변화된 것은 도주중인 사우디아라비아 부호 오사마 빈 라덴에게 은신처를 제공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1990년대 초부터 빈 라덴의 자금으로 국제테러조직의 훈련기지가 가동되면서 빈 라덴의 반미주의가 탈레반 세력에게도 전파된 셈이다. 빈 라덴 테러조직의 초기목표는 반미주의라기보다 이슬람권 국가들의 부정부패를 척결하는데 있었다. 그러나 빈 라덴은 사우디아라비아로 대표되는 일부 친미 이슬람 국가의 반이슬람 정책 성향과 이스라엘의 강경한 중동정책의 배후세력으로 미국을 지목하고 미국에 대한 테러 공격을 감행하였다. 1990년대 일련의 반미테러는 빈 라덴 조직과 연계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1998년 아프리카 케냐와 탄자니아 주재 미국대사관에 대한 폭탄테러사건은 탈레반 정권의 반미투쟁이 강화되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하였다. 미국이 폭탄테러사건의 보복으로 빈 라덴의 근거지로 추정되는 수단과 아프가니스탄에 미사일 공격을 단행했기 때문이다.

  20001911일에 발생한 미국 테러 참사 사건 역시 빈 라덴의 소행으로 드러나고 있는 가운데, 미국은 이에 대해 즉각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하고 빈 라덴의 색출과 체포는 물론 그와 국제테러조직을 비호하고 있는 국가에 대해서도 같은 보복대상임을 천명한 바 있다. 빈 라덴의 신병 인도를 거부한 아프가니스탄에 대해 결국 107일 공습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군사보복작전을 전개하였다. 국제테러조직과의 연계로 인해 아프가니스탄 내전의 성격은 새로운 방향으로 선회하였다. 아프가니스탄 내전은 각기 외부 세력의 지원을 받는 혼합형 내전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번 테러 참사 사건을 계기로 사실상 국제전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특히 미국의 강력한 응징 의지와 보복 작전, 그리고 반테러 국제연대의 결성에 따라 탈레반 세력은 정권의 존망 위기에 처하게 되는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다. 200111월 이전 탈레반 정권이 아프가니스탄의 90% 이상을 장악했던 데 비해, 1112일부터는 미국과 반테러 연합세력의 지원을 받는 북부동맹 측이 수도 카불을 점령하는 등 아프가니스탄의 절반 이상을 장악하는 역전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상황이다.

  

 

. 의미 및 영향

  아프가니스탄 내전은 처음에는 정치 노선과 정국 주도권을 둘러싸고 상이한 정파들(사회주의세력:이슬람세력)이 무력적 대결을 벌이면서 촉발되었으나, 1970년대 말 구소련이 자국에 우호적인 사회주의정권을 확고하게 유지하여 이슬람세력의 자국 내 파급을 차단할 목적으로 전면적 침공을 감행함으로써 1980년대의 새로운 국제적 냉전을 초래하기도 하였던 국제정치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오늘날에는 그 동안 반군세력으로서 정부군에 저항해 왔던 이슬람원리주의세력(탈레반세력)이 정국을 장악하고 그 반대세력을 축출하는 군사작전을 전개하고 있어 국지전 성격의 내전이 지속되고 있다. 이 내전은 오래 지속되면서 대규모의 인명 살상과 난민을 발생시켰으며, 러시아와 파키스탄 및 이란을 포함하여 주변의 여러 국가들에게 정치안보적 위험을 제기하고 있기 때문에 내전이 격화될 경우 이 지역 전체의 불안정을 야기할 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의 평화적 분쟁 해결 노력에도 큰 부담을 가중시킬 가능성이 크다. 한국은 안보적 측면에서는 직접적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희박하나, 이 지역의 불안정이 심화될 경우 그 주변국에서의 경제적 이익 추구에 제한을 받게 될 것이며, 유엔 중심의 인도주의적 활동에 참여하는 상황이 초래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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